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산슈 1세]] ==== 1185년 12월 6일, [[아폰수 1세]]가 76세의 나이로 [[코임브라]]에서 사망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산슈 1세]]'''는 1188년 1월 말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어수선해진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당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산슈 1세와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낸 산슈 1세는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함대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 남부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인 실베스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반격을 가해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습격해 여자, 아이 3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쿱 알 만수르는 1190년 포르투갈 남부를 공격해 토마르를 포위했다가 [[성전 기사단]]에게 후미를 격파당한 데다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슈 1세와 평화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1191년, 무와히드 왕조의 별동대가 포르투갈 왕국에 침입해 산슈 1세가 확보했던 실베스를 도로 공략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아라곤)|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산슈 1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새 왕국의 정치 및 행정 조직에 쏟아부었다. 그는 국고를 축적하고 중산층 상인들을 지원해 상업을 키우고자 했으며, 구베이아(1186년), 비세우(1187년), 브라간사(1187년), 상 비센트 드 베이라(1195년), 벨몬테(1199년) 등 여러 신도시를 포르투갈 남부 지역에 짓고 포르투갈 북부의 외딴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과 부르고뉴, 가스코뉴 등 프랑스 이주민들을 모집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또한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으며,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포르투갈 학생들에게 국비를 지원해주는 등 포르투갈 유학생들이 유럽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산슈 1세는 1188/1189년경에 둘세 왕비가 알렌케르, 보우가, 산타마리아다페이라, 포르투 일대의 수입을 가질 수 있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후 죽기 2년 전인 1209년 10월에 2번째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딸 마팔다, 테레사, 산샤는 여왕의 칭호를 받고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아폰수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